1969 /
Suejin Chung deals with and explores human consciousness through the medium of painting, emphasizing that it is not the existence of things but the perspective from which we look at them that is important, and that the symbols and linguistic meanings of the figures in the paintings have degenerated, leaving only their visual properties. By asking the viewer the question, ‘What is the meaning of that painting?’, he creates a multi-dimensional immersive and surreal visual experience by making an iconographic hermeneutic interpretation. He graduated from Hongik University and received his MFA in painting from the School of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Since her first solo exhibition at Daegu Sigong Gallery in 1999, she has held solo exhibitions at Project Space Sarubia dabang, Arario Gallery, Doosan Gallery, Gallery SCAPES, and Lee Eugean Gallery, and participated in group exhibitions at the 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Tirana Biennale, Shanghai Biz Art Center, and Busan Museum of Art. Major collections include the Korea Arts & Culture Education Service, Doosan Yonkang Foundation, SEONHWA Art and Culture Foundation and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Art Bank.
엄격한 자유로움
정수진 전에는 회화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정사각형 캔버스가 눈에 많이 띈다. 50x50cm, 100x100cm의, 화면이기 보다는 기하학을 생각나게 사각형은 다양한 것을 담는 그릇에 나름의 통일성을 부여한다.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는 창이기 보다는, 장기판이나 바둑판처럼 엄격하게 한정된 게임 판에서 보이지 않는 수직 수평의 축을 따라 시각적 문법이 생성되고 변형된다. 정수진의 작품에는 필연과 우연의 관계처럼, 엄격한 구조 안에서의 자유로움이라는 역설, 즉 다양성을 창출하는 이질적 논리가 있다. 거기에는 필자가 2000년에 사루비아 다방에서 처음 보았던 정수진의 ‘뇌해(Brain Ocean)’전 처럼, 호두알 같은 작은 공간(뇌)에 바다와 같은 실재가 있다. 자유로운 예술이라 함은 현실적으로 예술이 자유롭기 보다는 예술이라는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 둘 수 있는 무한한 게임의 수를 말한다. 예술은 놀이처럼 한정된 시공간 속에서 자유롭지만, 유비를 통해서 다른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
보는 사람도 끼어들고 싶을 만큼, 그 안에서 남부럽지 않게 잘 놀아야 하는 이가 바로 예술가다. ‘뇌해’ 전 이래로, 줄기차게 샘솟는 정수진의 마술적 놀이판은 경이로울 따름이다. 한국 미술계에서 특히 ‘개인의 세계’에 빠져있는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도상들이 우글우글하면서 파편적이고 분열적인 서사들이 가득한 회화들이 많이 발견된다. 정수진은 그 효시격인 작가지만, 그들과의 차이점은 현격하다. 결국은 동어반복처럼 보이는 우연적 입자로의 와해인가, 아니면 필연과 상호작용하는 힘 있는 우연인가의 차이이다. ‘다차원 존재의 출현’(전시부제), 즉 다양성이 가능하려면 간헐적 우연만으로는 힘들다. 힘찬 필연이 받쳐줘야 한다. 여기에는 수학이나 기하학, 또는 언어학 같은, 보다 보편적인 문법에 대한 취향이 요구된다. 작가에게 필연은 그림에 대한 끝없는 연구와 그린다는 행위 그자체로부터 발원한다. 필연과 우연의 관계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와 마찬가지이다.
가령 작가는 무의식과 혼돈을 바로 연관 짓는 것이 어색하다고 말한다. 정수진이 관찰한 바에 의하면, ‘무의식은 정교한 논리체계를 가지고 있고 그 체계를 따라서 움직이고’ 있다. 다만 의식이 ‘무의식의 논리 체계를 이해할 수 없어 혼돈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무의식이 의식과 연동하듯, 감각적, 지적 즐거움과 깨달음을 위해 작가는 필연의 망을 부지런히 짜왔다. 전시와 더불어 출간된, 시각언어의 논리에 관한 책 [부도(符圖)이론: 다차원 의식세계를 읽어내는 신개념 시각이론]을 보면 정수진은 매우 논리적인 작가이다. 부도이론이란, ‘논리적 사고 체계를 시각적으로 보기위한 이론’이며, 이 시각논리의 특징은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체계로 논리를 전개하지 않고, 같음과 다름이라는 판단체계로 논리를 전개한다’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서 논리라 함은, 사이비 교주나 어느 날 갑자기 득도한 사람처럼 어떤 자의적 의견 한 자락을 교조적으로 강조하거나, 여기저기에서 엉성하게 그러모은 상식 백과사전 같은 박식함이 아니라, 시각에 관한 독자적 이론이라 할 만한 것이 피력된다는 뜻이다.
정수진이 말하는 ‘부도’란 다차원적인 형상에 대한 일종의 도해적 기호(graphical symbols)처럼 보이며, 그림은 이 독특한 기호법의 산물일 것이다. 3차원이라는 일상적 차원을 넘어서면 가상의 차원에 접어들며, 화가는 기하학자 처럼 무한으로 뻗어나가는 패턴과 다면체를 탐구하게 된다. 그림과 관련을 가지는 그 텍스트는 어떤 자료가 한 형식에서 다른 형식으로 변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수학적인 두뇌를 가진 면밀한 연구자라면 정수진의 복잡한 회화를 그 기본 구성 요소로 분석한 후, 간결한 시각적 부호나 도식으로 변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차원의 수를 더해가는 어떤 비밀스런 경로를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수진의 그림이나 책은 어떤 세계에 편집증적으로 빠져있는 부류에서 발견되는 일정한 체계 내에서의 정합성이 발견된다. 종교처럼 믿느냐 안 믿느냐의 차이를 넘어선다면, 모든 믿음에는 나름의 정합적 체계와 논리가 있다. 종교와 비교하니 편향된 것 같지만, 한 시대가 선택하는 과학적 패러다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관객이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난해한 책을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고 하지는 않겠다. 정수진의 그림이나 시각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정수진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관객으로서는 밖에 나와 있는 것을 중심으로 작품에 접근할 수밖에 없다. 비록 [외부의 사실적 상황에 대한 단정적 규정에 대해 놀라다]같은 작품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작가가 안으로부터 밖을 향한 표현행위를 한다면, 관객은 밖에서부터 안으로 파고들어간다. 둘이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특이한 것은, 자신의 그림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라면서 책자에는 도판 한 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 책은 무슨 해설서라기보다는 글로 씌여진 또 다른 작품처럼 보인다. 시각논리와 그림은 서로를 활성화시키는 관계일 뿐, 일대일 대응은 아니다. 저기에 논리의 다발이 있고, 여기에 그림의 다발이 있다. 시각논리는, 비평도 마찬가지지만 주어진 대상을 복제(재현)하거나 또 다른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동어반복이고 어느 하나는 불필요하거나 불완전한 것이다. 양자는 평행, 즉 상응의 관계를 가진다. 양자는 전사가 아니라, 공명하는 것이다. 말과 사물의 관계처럼 머리와 손은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없다. 추상적 관념, 또는 아무 생각 없는 그리기 노동 어느 하나로의 환원도 무의미하다. 우리에게 흥미로운 것은 그 논리와 그 그림이 한 인간에게서 나왔다는 점이다. 그 책은 작가에게 수수께끼 같은 그림의 내용에 대해 묻는 괴로운 질문들을 피하기 위한 방책–‘거기에 다 써있어요’하면 그만?–은 아닐까 의심해 본다. 물론 그 책에 그림에 대한 답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답이 있는 장소를 분명히 가리키고는 있지만, 분명한 의미를 확정하는 것은 그림 읽기만큼이나 쉽지 않다. 정수진은 불분명한 것을 분명하게 가리킨다. 그림에는 구체적 형상이 등장하지만, 내용을 읽어나가기 힘들며, 자세히 그려진 도상과 얼룩이 혼재하는 화면처럼 작품과 논리는 역설의 무대이다.
전시된 작품 중 아무렇게나 뽑은 작품 제목 [2002년 1월 내쇼날 지오그래픽, 14 페이지에 나온 한 소녀의 얼굴로 표상된 가변적 지시-서술 구조를 가진 사실적 상황과 그를 둘러 싼 다양한 내적감각에 대한 표상들]을 보자. 매우 ‘구체적’인 듯한 이 작품제목이 이전에 작가가 애용하던 [무제]–이번 전시에서 [무제]라는 제목의 작품은 뒤의 얼굴과 똑같이 생긴 가면이 앞에 떠있는 듯한 그림 딱 한 점이 출품되었다–보다 더 확실하게 어떤 내용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어이가 없어서 폭소를 자아낼 만큼 모든 작품 제목이 길지만, 설사 여기에 몇 줄 더 한다 해도 상황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제목에는 ‘지시-서술구조’나 ‘표상들’이라는 분명한 의미만큼이나, ‘가변적’, ‘상황’, ‘다양한 내적 감각’이란 불확실한 의미(또는 변수가 많은)가 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64개의 형태소와 64개의 개념소’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게 많다면 이미 ‘소(素)’가 되기는 힘들 것이다.
형태소와 개념소에 대한 군론(group theory)적 체계화는 생물학자나 화학자, 또는 수학자처럼 존재 자체를 분류하고 정량화하는 방식일 것이며, 수 십 개의 형태소와 개념소가 조합되는 장은 엄청난 경우의 수를 발생시킬 것이다. 추상화가 아니기에 조합의 방식은 가늠하기 힘들다. 가령 수직/수평과 3원색으로 조합된 특정시기의 몬드리안의 작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복잡할 것이다. 책과 전시제목, 작품제목 등 개념을 파악할 수 있는 문장들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는 단어는 ‘다차원’이다. ‘다차원 존재(또는 생물)의 출현’(전시부제)이 있는 그림은 ‘다차원의 기하학’이다. 이러한 회화의 다차원성은 컴퓨터 시대에도 그림을 그리는 논리적 이유가 된다. 오늘날 같은 정보혁명의 시대에 화가는 왜 굳이 그림을 그리는가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대답은 최대한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 많은 화가들이 담보로 잡고 있는 ‘나’는 대답이 될 수 없다. ‘회화 그 자체’를 위한 것이라면 더욱 웃기다. 주체나 회화는 예술적 추구의 끄트머리에 있지 시작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수진은 인간을 컴퓨터와 비교한다. 그러나 양자는 비슷한 만큼이나 차이도 있다. 회화는 닫힌 형식에 의해 지배되는 기계적 알고리즘으로서의 컴퓨터보다 더 직관적인 컴퓨터인 인간에 의해 수행되는 열린 체계이다. 다차원은 풍부한 직관적 이미지로 재탄생한다. ‘다양한 것’이 술어에 머물지 않고 ‘다양체’–각각의 다양체는 n개의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실사로 만든 이는 현대 수학자 리만이다. 몇 년 전부터 정수진의 화면에 등장하는 무정형적 얼룩이나 흔적들은 다양체가 기하학 뿐 아니라, 난류같은 복잡한 흐름과 연관됨을 예시한다. ‘다차원’에 암시된 기하학적 비유는 풍부하다. 작품에는 3차원에서 불가능한 도형이나 유기체가 등장하며, 다면체는 발이 달리는 등 물활론적 생명을 부여받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차원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뇌이다. 정수진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호두는 뇌를 연상시킨다. 이전 작품에 잘 등장했던 양파가 까도까도 핵심이 없는 난감한 해석학적 순환을 상징했듯이, 한정된 공간에 무한한 주름을 접어 넣고 있는 뇌는 그림 그자체와 비유될 수 있는 각별한 존재이며, 이 미지의 대륙에서 갖가지 사건이 벌어진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호두알 속에 갇혀 있을지라도 내 자신이 무한한 공간의 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대사는 기하학을 비롯하여 공간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을 펼치거나 발견해왔던 뇌에 대한 가장 유명한 비유일 것이다. 작품 속 기하학은 매우 유연해서 만화 캐릭터나 식빵에 난 구멍에서도 발견된다. 나름의 질서가 있는 듯한 화면에서 종종 발견되는 얼룩이나 흔적 등은 수열이나 증식하는 이미지, 즉 무엇인가 생겨나고 소멸되는 상황이 연상된다.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고대 원자론자들이 주장했듯이 진공이나 공(空)의 개념이 필수적이다. 작품에는 [공에 대한 개념적 규정이 만든 얼굴의 출현]을 비롯하여 ‘공(空)’이 들어간 작품제목들이 많이 발견된다. [다차원 시서화 형식의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공백에 대한 분석적 대화]처럼, 화면 안에 뜬금없이 뚫린 구멍 뒤로 하얀 공백이 보이기도 한다. 공은 단순히 비어있음보다는 변형을 위한 여지에 방점이 찍혀있다.
그것이 생각하거나 독서하는 인물이나 두상과 결합되었을 때는 화면 속 인물에게서 전개되는 변화무쌍한 (무)의식적인 흐름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정지된 매체인 회화에 잠재적인 움직임을 준다. 반복이나 자기 지시적 상황을 알려주는 그림들은 다차원적인 그림이 재현과는 무관한 것임을 알려준다. 그림은 마치 수학처럼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구조로서의 내적 논리를 동력으로 생산된다. 구조는 종종 실재로 간주된다. 그림이나 상상은 더 이상 지적 유희에 머무는 것을 거부한다. 예술에서의 다차원은 실험과 연결될 수 있다. 작품 제목에 종종 등장하는 제임스 조이스는 의식의 흐름과 언어 실험을 연결시킨 전위–‘전위적 시의 구성이 만든…’으로 시작되는 문장은 작품 제목에 많이 등장한다–적 작가로 평가받아왔다. ‘다차원’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의 작품들에는 기하학적 패턴으로 짜깁기된 인간 같은 기이한 존재태들 뿐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통하는 구멍이 보이는 등 불연속적 화면의 병치가 특징이다.
각각의 차원에는 다른 존재태들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것은 한 화면상에서 모순 없이 공존한다. 정수진의 작품에는 하나의 기하학이 아니라, 제 각각의 논리를 따르는 다양한 기하학이 선택된다. 시오반 로버츠는 기하학자 콕세터를 다룬 전기 [무한 공간의 왕]에서 ‘수많은 기하학들이 존재하고 그 각각의 기하학들은 동화 속 나라와 유토피아들과 같은 다른 세계를 설명 한다’고 말한다. 그 곳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참신하게 다른 곳들’이다. 정수진의 작품에서 기이한 변형이나 증식은 작품 [공에 대한 개념을 알려주는 순수한 음료들]처럼 일련의 계열을 이루며 진행된다. 그것은 마치 위상수학자들처럼 늘리기, 비틀기, 누르기 등을 통해 변형되어도 보존되는 형상의 속성을 말한다. 작품에는 위상기하학에서 정육면체와 구의 관계처럼 위상동형(homeomorphic)인 다면체가 존재한다. 이러한 기하학적 상상력은 수학적 논리와 공리, 숫자와 방정식으로 나타내는 대신에, 직관이 발휘하는 풍부한 시각 이미지로 탄생된다.
정수진의 작품은 지금 여기와는 다른 세계에 대한 풍부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다차원’은 기하학자의 몫을 넘어선다. 20세기에 고전기하학을 고수했던 콕세터가 수학을 엄격한 공리학이 아니라, 수영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듯이 배워야 함을 강조했던 것처럼 말이다. 정수진의 작품에는 아침 식사로 나온 식빵이나 줄넘기하는 소녀에도 다차원의 기하학이 존재한다. [우주구조의 신비]와 [우주의 조화]를 쓴 케플러나 ‘세계의 체계 구조(the system of the world)’를 설명하려던 뉴턴처럼, 정수진은 준과학자적 열정으로 회화의 세계를 탐구한다. 그것은 기하학처럼 형상(figure)을 연구하지만, 특정 기하학을 단순히 그림으로 번역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의 그림은 도형이나 숫자로 채워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림은 차원을 유추하는(dimensional analogy) 장이다. 기하학이 수학적 유비를 정교하게 만드는 수단이듯이, 그림 또한 그렇다.
전시부제에 포함된 ‘출현’이라는 단어는 수직수평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좌표축에 4차원 같은 시간을 도입한다. 초공간, 혹은 n차원의 기하학이라는 고차원의 영역을 다룸에 있어서, 화가로서는 공간적인 비유가 중요하다. [무한 공간의 왕]에 의하면 고차원은 존재의 어떠한 수치나 특징도 나타낼 수 있다. 가령 제4차원은 온도나 풍향일 수 있고, 제5차원은 신용카드의 이자율일 수 있으며, 제6차원은 연령일 수 있다는 식으로 원하는 대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각각 측정된 특성들은 또 다른 차원으로 더해진다. 몇 백 개의 차원으로 까지 확장될 수도 있겠지만, 도대체 그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무한 공간의 왕]의 기하학자 콕세터는 현대의 기하학자 역시 피타고라스 시대의 그것과 크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곧 심미적인 목적—피타고라스학파는 수로 이루어진 조화로운 우주(천체)의 음악을 듣고 싶어 했다—이다.
콕세터는 ‘수학자는 화가나 시인처럼 패턴을 만드는 사람이다. 수학자의 패턴은 미술가나 시인의 패턴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워야 한다. 관념들은 색깔이나 단어처럼 조화로운 방식으로 맞아 떨어져야 한다. 아름다움이 첫 번째 기준이다. 꼴사나운 수학은 세상 어디에도 영원히 머물 곳이 없다’고 말했다. 가령 콕세터는 이러한 맥락에서 ‘모듈화된 공간의 컴팩트화’를 연구했으며 ‘최밀 충전과 거품덩어리’에 대한 강의에서는 거품 덩어리에서 하나의 거품과 접촉하는 거품의 수를 공식화하기도 했다. 이 세상에는 그처럼 당장의 쓸모와는 관계없는 것들을 연구하는 이상한 부류들이 있다. 화가 역시 그 과에 속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들을 묶어주는 아름다움을 위한 여정에서 사회적 의미나 물질적 이익 같은 유용성은 나중에나 덧붙여지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머릿속에 은거하는 은둔자’(시오반 로버츠)로서의 면모가 발견된다. 기하학자나 화가가 탐닉하는 세계는 혼란스런 이 세상과도 다른 즐거운 수수께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수진의 난해함은 유쾌하다.
이선영 (미술평론가)